한국의 근현대사 교과서는 80퍼센트가 일본과 관련되어 있다.
랜덤으로 페이지를 펼치면 일본이라는 단어가 거의 무조건 써져있는
그 양이 너무 많다
韓国の近現代史教科書は、80%が日本と関連している。
ランダムにページを展開すると、日本という言葉がほとんど無条件書いてい
、その量があまりにも多い
일본은 우리 나라의 근대회를 위한 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도로와 수도 시설을 갖추고, 은행,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시설은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일본인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필요한 시설비는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로부터 차관을 얻어 부담하도록 강요하였다.(pp. 248-249) 日本はわが国の近代化のための事業という名目で道路と水道施設を整え、銀行、学校、病院などを設立した。こうした施設はわが国に来ている日本人のためのもの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これに必要な施設費は私たちの政府が日本政府から借款を得て負担するよう強要した。(pp. 250-251)
일제의 한국 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 체제였다. 국내외의 한국인들은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의 권리를 끝내 쟁취하였다. 그 시기는 억압과 투쟁의 역사 만은아니었다.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p. 78) 日帝の韓国支配は、韓国人の政治的権利を否定した暴力的抑圧体制だった。国内外の韓国人たちは不屈の闘争で独立の権利をついに勝ち取った。その時期は抑圧と闘争の歴史だけではなかった。近代文明を学習し実践することで、近代国民国家を建設し得る「社会的能力」が厚く蓄積された時期でもあった。
식민 지배하에서 한민족은 일제의 경제적인 수탈에 큰 고통을 받았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큰 피해는 토지를 약탈당한 것이었다.(p. 258) 植民支配下で韓民族は日帝の経済的な収奪にひどい苦痛を被った。この中でもっとも大きな被害は土地を侵奪されたことだった。(p. 260)
일제는 모자란 쌀을 조선에서 확보할 목적으로 산미 증식 계획을 세웠다. 토지와 수리 시설, 종자 등의 개량을 통해 식량 생산을 대폭 늘려 일본으로 더 많은 쌀을 가져가고, 우리 나라 농민의 생활도 안정시킨다는 것이 목표였다. 쌀 생산량은 어느 정도 늘어났으나. 원래의 계획대로 추진되지는 못하였다. 반면에, 일본으로 쌀의 반출량은 계속 늘어나 1934년에는 거의 목표량에 가깝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 내에서는 식량이 부족하여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 등으로 식량을 충당해 갔다. (p. 158) 日帝は足りない米を朝鮮で確保する目的で、産米増殖計画をたてた。土地と水利施設、種子等の改良を通じて食糧生産を大幅に増やし、日本にさらに多くの米を持って行き、わが国の農民の生活も安定させるというのが目標だった。米の生産量はある程度増えたが、本来の計画どおり推進されなかった。反面、日本へ米の搬出量は継続して増え、1934年にはほとんど目標量に近くなった。これによって朝鮮内では食糧が不足し、満州から持ち込んだ雑穀等で食糧を充当して行った。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소유권이 사정된 토지는 전국적으로 총 1,910만 7,520필지에 달했다. 그 가운데 소유지의 신고대로 소유권이 사정된 것이 1,900만 1,054필지로 99.5%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그 반면에 무신고지로 국유지로 편입된 것은 주로 분묘지나 잡종지였는데, 도합 8.94필지 (0.05%) 에 불과하였다. 총독부가 신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한국 농민에게 신고를 강요하고, 전체 토지의 40%에 달하는 무신고지가 발생하자 국유지로 몰수했다는 기존의 주장은 원래부터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p. 85) 土地調査事業によって所有権が事情された土地は、全国で総計1,910万7,520筆地に達した。そのうち所有地の申告どおり所有権が査定されたものが1,900万1,054筆地で、99.5%の絶対多数を占めた。その一方で無申告地として国有地に編入されたものは、主に墳墓地や雑種地だったが、合計8,944筆地(0.05%)に過ぎなかった。総督府が申告が何かも知らない韓国農民に申告を強要し、全体の40%に達する無申告地が発生すると国有地として没収したという既存の主張は、元来から根拠がないものだった。
식민지 시기에 한국인의 생활수준이 일제의 수탈로 극도로 열악해졌다고 보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다. 예컨대 생산된 쌀의 절반을 일본에 빼앗고 한국인은 초근목피 (草根木皮) 의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수탈론에는 실증적인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 쌀은 일본에 수탈된 것이 아니라 경제 논리에 따라 일본으로 수출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인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소득은 증가하였다 쌀을 대신해서 만주에서 조와 콩이 대용식품으로 수입되었다. 쌀의 1인당 소비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잡곡 등 대용식품과 기타 가공식품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1인당 열량 섭취가 줄어들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생활비 가운데 식료품비의 비중을 나타내는 엥겔계수도 하락하여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개선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1890~192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들의 키가 1~2cm 커진 것도 생활수준의 개선을 의미한다. (p. 98) 植民地時期に韓国人の生活水準が日帝の収奪で極度に劣悪になったと見るのが、従来の通説だった。例えば生産された米の折半を日本に奪われ、韓国人は草根木皮の惨めな生活を強要されたといったものである。このような収奪論には、実証的な根拠が確実でないという問題点がある。米は日本に収奪されたのではなく、経済論理によって日本に輸出され、それによって日本人を包む韓半島全体の所得は増加した。米の代りに満州から粟と豆が代用食品として輸入された。米の1人当り消費が減少したのは事実だが、雑穀等の代用食品とその他の加工食品を総合的に考慮するとき、1人当り熱量摂取が減ったとは断言できない。生活費のうち食料品費の比重を表すエンゲル係数も下落し、人々の生活水準が改善したことを示唆している。1890~1920年代に生まれた韓国人たちの背が1~2cm大きくなったことも、生活水準の改善を意味する。
이로써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면서 발전해 온 우리 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노예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 (p. 255) こうして長い間独自の文化を創造しながら発展して来たわが民族は国を奪われ、日帝の奴隷状態に陥るようになった。(p. 257)
불과 30년 사이에 인구가 50% 넘게 증가한 것은 공중보건과 의료 개선으로 사망률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유아사망률이 크기 낮아졌다. 전통시대에는 홍역ㆍ 콜레라ㆍ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 유행했고, 이것이 기근과 더불어 인구의 증가를 억제하였다. 총독부는 보건위생 업무를 경찰 소관으로 하여 식수와 음식 등 오염원을 관리하고 예방접종에 힘을 써, 전염병의 발생과 전파를 막았다. (p. 95) わずか30年の間に人口が50%を超えて増加したのは、公衆保健と医療の改善で死亡率が低下したためである。特に乳児死亡率が大きく低下した。伝統時代には紅疫病・コレラ・天然痘等の伝染病が流行し、これが飢饉と相まって人口の増加を抑制した。総督府は保健衛生業務を警察の所管とし、食水と飲食等の汚染源を管理して予防接種に力を入れ、伝染病の発生と伝播を防いだ。
그리고 일제는 우리의 민족 정신을 뿌리뽑기 위해 이른바 일ㆍ선 동조론을 주장하였고, 내선 일체와 황국 신민화 등의 구호를 내걸었다. 또, 우리말 사용을 금하고 일본어만 쓰도록 하였으며, 우리 역사의 교육도 금하였다. 한글로 간행되던 신문도 폐간시키고, 우리말과 역사에 대한 연구도 금지시켰다. (p. 261) そして日帝は私たちの民族精神を根絶やしにするため、いわゆる日鮮同祖論を主張し、内鮮一体と皇国臣民化のスローガンを掲げた。また、韓国語の使用を禁じ、日本語だけを使わせ、私たちの歴史を教えることも禁じた。ハングルで刊行されていた新聞も廃刊させ、韓国語と歴史に対する研究も禁止させた。(p. 263)
이처럼 한국인에게 가해진 새로운 규율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것들이지만, 근대사회의 규율로서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정신문화에 점차 내면화되어 갔다. (p. 104) このように韓国人に加えられた新しい規律は、日帝の植民地支配のためのものだったが、近代社会の規律として韓国人の日常生活と精神文化に徐々に内面化されて行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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